- 철쇄가 어떻게 명량에서 작용했을까?울돌목의 지형적구조와 조석환경에 의거한 사유.
해전이 시작된 음력 9월7일은 물때를 보자면 조금(조석차가 완만)에서 벗어나 사리(조석차가 큼)로 다가가는 시기다. 또한 이때 일본군이 순류를 타고 공격을 시작했음을 알수있다. 순류를 타게되면 불어오른 물마루를 타게 되는데 이때는 첨저형의 일본 목선이라도 충분히 장애물 없이 수중 철책을 넘게 된다. 다만 원래 울돌목이 좁고(세키부네같은 함선이 지유롭게 활동 가능한 영역은 더욱 좁다.)빠른 물살때문에 함부러 많은 수의 병선이 넘어 올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문에 이순신의 대장선과 일부 함선들은 적들을 견제하면서 시간을 벌며 싸울 수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이번엔 일본 함대쪽으로 역류가 흐르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때는 물마루가 일본 함대 앞에 형성되고 일본함대는 썰물때문에 그 위치가 철쇄에 걸릴 정도로 낮아지는 것이다. 들어올때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하던 철쇄가 막상뒤로 몰릴때가 되니 간조차에 의해(주변의 옥포는 약 3m정도 된다.) 걸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좁은 해역에 몰린 일본 함대에 불화살을 쏘아 조선수군은 결정적 타격을 입힐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충무공이 난중일기에 적은 "실로 천우신조 였다"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철쇄설 긍정론 입장의 견해인 듯 합니다. 가부는 둘째치고 철쇄설을 전반적으로 부정하는 문단의 맨 뒤에 붙어 있어 편집상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문단 자체가 내용이 길어서 별도로 빼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